<그러니까, 이것이 사회학이군요> #3 우에노 지즈코

후루이치 노리토시 X 우에노 지즈코

‘사회학은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이 글은 코난북스에서 출간 예정인 <그러니까, 이것이 사회학이군요> 본문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우에노 지즈코’와 언제 어떻게 만나는가, 그에 따라 우에노 선생의 이미지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젠더론의 개척자’ ‘공격적인 페미니스트’ ‘교토의 여왕’ ‘도쿄 대학의 귀신 교수’ ‘품위 없는 말이 전문인 인생 상담가’ ‘개호 문제 전문가’ 등에 이르기까지, 우에노 선생에게는 수많은 얼굴이 있다. 그만큼 경력이 길고 활동 분야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우에노 선생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신앙자가 되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한 사상》에서 그는 기도를 ‘무력한 자가 하는 최후의 행위, 행위라고 부르지 못할 정도로 무력한 중얼거림’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기도하지 않고 살고자 페미니즘을 선택했고, 사회학이라는 무기를 손에 넣었다. 실제로 우에노 선생의 사회학에는 ‘기도’가 없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신기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우에노 선생의 말에서 언제나 ‘희망’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도 ‘닳고 닳은 리얼리스트’인 그가 제대로 현실을 분석하고서 엮어내는 희망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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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는 샤먼이다

우에노 이론이란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죠. 나는 거대 이론의 예견 능력 따위, 전혀 믿지 않아요. 이론은 늘 변화하는 현실을 우직하게, 충실하게 쫓아가서 설명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학자는 샤먼’이라는 게 내 지론이에요.

후루이치 샤먼이요?

우에노 예전에 〈버거, 우리의 샤먼〉이라는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어요.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Peter L. Berger) 말입니다. 샤먼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설명해주는 사람, 이른바 사회를 풀어내는 사람입니다. 샤먼의 수수께끼 풀이에는 옳다/옳지 않다는 진위 판정이 없어요. 그렇기에 ‘옳은 샤먼’은 없습니다. 그 글에도 썼는데 ‘능숙한 샤먼’과 ‘서툰 샤먼’이 있을 뿐입니다.

후루이치 왜 ‘옳은 샤먼’은 없나요?
우에노 경험적인 현실에 내놓는 설명은 현실에 가까운 것이기는 해도 사실 검증이 불가능하니까요. 그 설명을 판정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면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y)’이나 ‘그럴싸함(plausibility)’입니다. ‘그럴싸함’이 판정 기준이니까 옳은 설명은 없고, 능숙한 설명과 서툰 설명이 있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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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은 없다

후루이치 우에노 선생은 사회학자인 동시에 젠더 연구자이기도 한데요, 그 둘 사이에 갈등은 없나요?

우에노 없어요. 왜 갈등이 있다고 생각하죠?

후루이치 사회학자는 사회학이 사회과학인 이상, 매사를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시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요. 그런데 젠더 연구자로서 우에노 선생은 ‘사회는 이러해야 한다’라는 사회운동가의 의식도 있지 않나요?

우에노 고리타분하네, 후루이치 씨. 사회과학자가 중립적인가요?

후루이치 그래도 경험적인 현실에 기반을 두고 연구 결과로서 어떤 것을 도출해내지 않습니까? 그런 행위와 사회를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려는 행위는 충돌하지 않나요?

우에노 올바른 전략을 세우려면, 자신이 싸워야 할 대상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잘못을 저질러요. 게다가 효율도 낮아지죠. 나는요, 《가부장제와 자본제》라는 책을 쓰면서 그걸 절실히 깨달았어요. 가부장제도 자본제도 내가 싫어하는 두 가지 적이죠. 그걸 분석했더니 어디가 약점인지 정확하게 이해했어요.

후루이치 그럼 처음부터 이미 싸워야 할 상대가 있었던 거군요.

우에노 당연하죠. 의문이 생긴다는 것은 그런 거니까요. 의문에는 공평도 중립도 없어요. 나는 학생들에게 ‘가설’이 무엇인가 하면 ‘너의 억측과 편견’이라고 설명합니다. 연구가 증거에 기반을 두는 것은 적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죠. 적을 착각하면 안 된다는 의미일 뿐이고, 역시 싸우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후루이치 우에노 선생에게는 계속 적이 있었던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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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에겐 가벼운 엉덩이가 필요하다

후루이치 사회학에는 어떤 사람이 적합할까요?

우에노 예전에는 주로 첫째로 호기심, 둘째로 호기심, 셋째, 넷째는 없고 다섯째로 가벼운 엉덩이라고 말했죠. (웃음)

후루이치 ‘가벼운 엉덩이’는 어떤 뜻인가요?

우에노 호기심에 몸이 따라가서 현장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호기심은 ‘어라?’나 ‘으응?’ 하는 깨달음이나 잡음을 말해요. 평범한 사람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궁금해서 몸을 움직이는 사람에게 적합합니다. 여기에 더해서 요즘에는 조금 다른 말도 하고 있어요. 사회학자의 또 한 가지 조건은 상상력보다 현실이 풍부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게 아주 중요해요.

후루이치 왜죠?

우에노 나는 사회학자의 가상의 적이 작가나 창작가라고 생각해요.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하고 싶다’라고 착각하고는 사회학과에 들어오는 학생이 있거든요. 나는 그런 사람들한테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완벽하게 독창적인 일을 하고 싶다면 창작과에 가라고 하죠. 연구란 아티스트(artist)의 일이 아니라 아르티잔(artisan), 바로 장인의 일입니다.

 

후루이치사회학표지

이 책은 5월 18일 출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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