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것이 사회학이군요> 미리보기 #1

후루이치 노리토시 X 오구마 에이지

‘일본에서 사회학이란 무엇입니까’

 

*이 글은 코난북스에서 출간 예정인 <그러니까, 이것이 사회학이군요> 본문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나와 사회학의 첫 만남은 대학교 1학년 때 수강한 오구마 에이지 선생의 수업이었다. 구조주의나 아이덴티티, 내셔널리즘 등을 주제로 오구마 선생이 라이브 콘서트처럼 90분간 논스톱으로 강의하는 수업이었다.

“일본 민족이 원래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일본 민족이라는 구별법이 생긴 뒤에 비로소 일본 민족과 그 역사가 생겼다.”

“‘개인’이란 개별 행위의 집적점으로 사회 현상의 결절점에 불과하다.”

당시 내게는 이런 논의가 신선했다. (중략)

오구마 선생은 동일본대지진 이후 ‘사회’에 더 깊이 참여하고 있다. 나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라는 책을 쓰려고 탈핵 시위를 취재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오구마 선생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시위에서 적극적으로 연설하고 있었다.
사회를 바꾸는 방법은 다양하다. 오구마 선생은 다양한 ‘표현’이라는 수법을 사용해서 사회를 바꾸려고 해왔다. 오구마 선생에게는 사회학도 그 여러 표현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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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이치 이 책에서는 사회학자 여러분께 ‘사회학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려고 합니다. 애당초 사회학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이게 정말 어렵습니다. 실제로 사회학자에게 사회학이 뭔지 물어보면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대답이 돌아올 겁니다. 그런 다양한 대답을 들으면서 사회학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오구마 선생님이라면 ‘사회학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어요?

오구마 현재 일본 사회의 문맥에서는 ‘평론가’겠지요.

후루이치 평론가요?

오구마 미국이나 미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 대부분에서 사회학은 실증적인 학문입니다. 인터뷰, 현지조사(field work)를 하거나, 질문지를 배부해서 얻어낸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사회학자가 하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일본에서도 사회학 학회에 가보면 그런 실증적인 보고가 90퍼센트 정도를 차지해요. 그런데 일반적인 일본인에게는 ‘사회학자=사건이나 사회 현상을 명쾌하게 읽어내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 같아요. 그래서 현대 일본 사회에서는 학문으로서 사회학과 별개로, 사회학자는 평론가를 대신하는 말로 유통되고 있습니다.

후루이치 그런 괴리는 왜 생겼을까요?

오구마 어느 시대든 대중매체는 심부름센터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런데 법학자나 경제학자는 법이나 경제 이외에는 평론하지 않죠. 그래서 정치 현상이나 경제 현상이 아니고 사회 현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대상을 논평할 필요가 있을 때, 어느 시기 이후로는 사회학자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회학이라는 학문과 분리되어 ‘평론=사회학’이라는 이미지가 정착되지 않았을까요?
(중략) 사회학이 여타 학문과 다른 점은 경제나 정치로 분류하지 못하는 사회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죠. 그런데 제 견해로는요, 사실 사회학은 잔여 항목의 학문이라고 생각해요.

후루이치 잔여 항목이라니요?

오구마 정치학이나 법학, 경제학 등의 대상이 되지 않는 부분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영역을 횡단하는 것이죠. 미국에서 사회학은 이민 사회 같은 여러 문제를 실증 연구하는 학문으로 발달했는데, 역시 다루는 대상은 경제학이나 정치학으로 다루지 못하는 잔여 영역이었어요. 일본에서도 그런 것이 사회학으로서 수용되었다고 봅니다. 즉 사회학은 마을이나 공장에 들어가서 실증조사하는 학문이거나 경제학이나 법학의 대상이 되기에는 어려운 ‘사회 현상’을 평론하는 학문이라고요.

간단히 말해서 사회학이란, 원래는 사회 현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려는 학문이었지만, 점차 개별적인 잔여 영역을 실증 연구하는 학문이 되었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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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이치 저는 학부생 시절에 SFC(게이오기주쿠 대학 쇼난후지사와 캠퍼스)에서 들은 오구마 선생님 강의가 정말 재미있었어요.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중요하게 여기는 학부였는데, 그때 선생님에게서 이른바 고전, 근대사상을 배웠죠. 참 신선했습니다. 새삼스럽게 묻습니다다. 마르크스 같은 고전을 읽고 공부하는 의미는 뭘까요?

오구마 이론이나 수법은 관용구(idiom) 같은 것입니다. 기본 발상을 응용하려고 할 때 아주 좋은 예시가 되죠. 일단 사용하면 당장에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 반복하면 마치 자동 장치처럼 똑같은 것밖에 할 수 없죠. 그러니까 이론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봐야 합니다. 그러려면 고전의 근원이 되는 고전을 읽고, 다른 사람들이 고전을 어떻게 응용했는지 비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플라톤이 위대하니까 읽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플라톤을 일종의 종교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바탕으로 삼아 ‘이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고 저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겠다’라고 하면서 응용해온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 다양한 응용법을 알면 자신도 다른 응용법을 쓸 수 있게 되죠.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태를 ‘센스’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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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이치 오구마 선생은 탈핵 운동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시죠. 어떤 주제나 메시지가 있나요?

오구마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일어서는 것이라는 긍정적인 이야기입니다. 일본어가 의미하는 ‘비판’을 하는 것에는 흥미가 없어요. 그건 너무 간단해서 지루합니다.

후루이치 탈핵 시위라는 형태의 민주주의, 그 어떤 점에 오구마 선생은 공감하신 겁니까?

오구마 그걸 말로 표현하려면 터무니없는 몽상이 될 테고, 또 시위라고 해서 언제든 어떤 것이든 다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시위가 비교적 좋은 상태일 때 나오는, 정체가 불불명한 것이 좋습니다. 사람들이 왜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일을 하나 싶은 현상은 대체로 흥미롭죠. (중략)
2011년부터 2012년 단계에서는 정말 도무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시위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지켜보면서 ‘이렇게 된 거군’ 하고 이해한 부분도 있지만, 늘 예상을 벗어났습니다.

후루이치 그럼 그것을 분석하겠다는 의식은 별로 없었나요?

오구마 네,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서 분석하려고 했는데, 그 분석이 차례차례 어긋났어요. 나는 그게 훨씬 재미있습니다. 내 분석력이 기를 펴지 못하는 이상한 대상을 좋아해요. 이론보다 역사나 현대의 사실을 조사하기 좋아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사회학이군요>는 5월 1일 출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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