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고통에 익숙해지지 말라
내 삶에 용기가 되는 인권 가치 교과서
『사람을 옹호하라』는 인권활동가 류은숙이 쓴 ‘인권 가치 교과서’다. 저자는 1992년 인권운동사랑방 창립 멤버로 인권운동을 시작한 이래 공공기관, 지자체, 학교 등 다양한 곳에서 십수 년 넘게 인권을 주제로 교육을 해왔다. 그러면서 삶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인권의 역동성을 담은 인권 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인권을 쉽게 말하는 방법이 있다. <세계인권선언> 같은 국제 규범을 보여주고 한국에서 일어난 공인된 인권 침해 사례를 나열하면서 사람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엄하다는 선언으로 마치면 된다. 그 결과 인권은 ‘천부인권’처럼 누구나 당연히 알고는 있는 말이 되었다. 그럴수록 자유, 권리, 평등 같은 말들은 의의나 맥락이 빛이 바래고, 누구나 자기를 편들 때 가져다 쓰는 언어가 되었다.
이에 저자는 다른 인권활동가, 사회학자, 여성학자 등 십여 명과 함께 공부하면서 새롭게 정의하고 다시 발견해야 할 인권의 가치를 추려 이 책에 담았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역사적 맥락이 있는지 살핀다. 권리, 자유, 평등, 연대라는 가치 또한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위협하는 반인권적 가치들이 지금 왜 준동하고 있는지, 이를 가려서 살피기 위한 인권 감수성 역량이 지금 왜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성차별, 여성혐오, 노동재해가 일상인 사회, 그런 차별과 고통에 익숙해지고 책임을 도리어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사회에서 그 차별과 고통에 익숙해지지 않고 맞서려면 새로운 언어의 힘이 필요하다.
『사람을 옹호하라』는 현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으면서 인권 감수성의 시야가 탁 트이는 책이다. 잘못 쓰이고 함부로 쓰이는 인권의 언어를 바로잡아 정말 그 가치가 자기 삶에 절실한 이들을 옹호하고자 하는 힘을 담았다.
권리 대 권리, 자유 대 자유…
대결 구도에 익숙해지는 대신 맥락을 이해하는 힘
영화 <카트>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2007년 어느 대형 마트 농성장. 해고 위기에 놓인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걸고 싸울 때 누군가 외쳤다. ‘쇼핑할 권리도 인권이다.’ 입점 상인들 또한 영업할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보장하라고 시위를 벌이면 퇴근할 권리를 주장한다. 특수학교를 설립해 장애아동의 교육권을 보장하려고 하면 주민들이 재산권을 침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언어, 권리와 권리의 충돌 같은 구도에 익숙해져 있다.
그 결과 매사를 대결로 보거나, 반대로 모든 자유는 소중하다는 식으로 맥없이 희석된다. 혐오표현, 반인권적 행위를 일삼는 이들도 자신의 자유, 권리를 주장한다. 여성 인권을 보장하라고 하면 남성의 인권도 소중하다고 말하고,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고 하면, 백인의 생명도 소중하다고 되받거나 모든 사람의 생명은 소중하다고 논점을 흩트리는 식이다.
이렇듯 대등하지 않은 것을 두고 우위, 우열을 따지면 그 아래 깔린 구조, 맥락을 볼 수 없다. 자원을 많이 가진 쪽은 대결 구도에서 훨씬 유리하니 불평등을 권리 충돌로 몰아가려고 한다. 권리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패자로 취급되고, 패자인 자신을 탓한다. 이런 구도에 익숙한 사람들은 사회의 패배자들에게 자원을 분배하는 것조차 부당하다고 느낀다. 인권의 언어가 오․남용되는 현실의 악순환이다.
이 책에서 인권이라는 기획의 출발점부터 되새겨보려는 의도도 여기에 있다. 이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 중 하나는 ‘관계’다. 인권은 인간의 취약함을 서로 인정하고 보완하고자 하는 약속이고, 세계대전이라는 참상을 경험하고 더는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고 맺은 약속이 인권의 기획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유, 평등, 권리, 연대 같은 인권의 가치들은 지나간 시대의 것, 보편적인 인류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들이 매순간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다. 이 책은 그 안에서 보다 세심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보다 차별과 고통의 맥락을 이해하도록 돕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언어, 행동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스스로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사소한 불의로부터 거대한 악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옹호하고 인권 감수성 역량을 강화하는 힘
저자는 인권 감수성을 “어떤 상황을 인권과 관련한 문제로 감각하고, 상황을 재해석하고, 지금과는 다른 행위를 상상할 수 있는 역량, 그 상황과 자신을 연결함으로써 책임성을 공유하는 역량”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특정 타인에게 들러붙은 특성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여기는 인식을 되짚어보는 힘이다.
이 책에는 따옴표 안에 담긴 말이 많이 등장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언어, 우리가 접하는 언어를 들여다보면 인권 감수성이 무엇이고 이를 강화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인들이 검은 피부인 사람을 ‘흑형’이라고 부른다. 신체의 탁월함을 추켜세우는 말로 쓰인다. 정작 흑인들은 이 단어가 인종차별적이라고 불쾌해한다. ‘흑형’이라는 말은 흑인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미리 규정하는 표현이다. 운동을 싫어하거나 못하는 흑인의 고유함은 담지 못한다. 또 흑인의 육체적 힘이 어떤 식으로 부각되었는지 그 역사를 헤아리지 못한다.
성폭력과 성차별에 저항하는 여성에게 “너 메갈하냐?”고 묻는 말도 마찬가지다. 고유한 한 인간, 여성으로서 드러날 기회를 봉쇄하면서 낙인을 찍는다. 이를 ‘인종화’라고 한다. 피부색만으로 낙인을 찍어 배제하고 차별하는 인종주의처럼 개인을 특질을 가진 집단으로 묶어 차별하는 것을 일컫는다. 낙인찍힌 여성들에게는 언어폭력은 물론이고 직장을 빼앗는 것 같은 구체적인 박탈 행위가 이어지기도 한다. 폭력의 언어가 구체적인 행위로, 구조적인 차별로 이어지기에 폭력의 고리를 살피고 차단하는 힘이 필요하다.
저자는 인권이란 있지 않은 것을 구현한 획기적인 기획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불평등에 맞선 가장 약한, 가장 낮은 사람들이야말로 “인권의 저자”라고 말한다. 여성혐오, 성차별, 불평등이 굳어가고 있는 지금 한국 사회에 인권 감수성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권은 그저 좋은 말, 있으면 좋은 것, 당연한 것, 교과서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하는 가치다. 상투적인 세계를 벗어나 전혀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실현하는 힘이다. 저자는 “열등하고 무시해도 좋다고, 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있는 역량”이 인권이라고 말한다. 사소한 불의부터 거대한 악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훼손하려 하는 반인권적 가치들이 차고 넘치는 이때, 이 책이 그런 용기를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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