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그때, IMF 외환위기

아래 내용은 책 <한국 경제,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외환위기’를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외환이 부족해 위기에 처했다는 뜻이다. 1997년 11월, 외국에 진 빚을 갚아야 하는데 갚을 외환, 즉 달러가 부족해서 국가부도 위기에 몰렸다. 그래서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 위기를 넘겼다. 11월 하순에 요청하고 12월 초에 구제금융이 결정되었으니 외환위기의 발생부터 해결까지 2주 정도 걸렸다. 형식적으로는 그렇다.

‘IMF 외환위기’라고 표현했지만 사람들은 흔히 그냥 ‘IMF’ 또는 ‘IMF 사태’라고 부른다. “IMF가 터져서 사업이 망했다” “IMF 사태 때 직장을 잃었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IMF는 국제통화기금을 뜻하는 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약칭이다. 외환위기를 겪는 국가를 지원하는 등의 사업을 목적으로 미국이 주도하고 선진국들이 돈을 출연해 만든 기구다. IMF는 당시 한국에 달러를 꿔줘 위기를 넘기게 해줬다. 그러니 우리가 겪은 외환위기를 ‘IMF 사태’ 식으로 부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외환위기 책임이 IMF에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발발 이후, IMF에서 지원된 달러 규모는 총 550억 달러 정도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일까? 외환위기 때 최고 환율은 1달러에 2000원에 육박했다가 외환위기가 진정된 이후 1200원 이하로 떨어졌다. 그러니 550억 달러는 외환위기 당시 최고 환율을 기준으로 하면 100조 원이 넘고, 정상 시기의 최고 환율을 기준으로 하면 60조 원이 넘는 돈이다.

1997년 중반부터 돈을 빌려준 해외 금융기관들이 만기 연장을 거부하고 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종금사들이 동남아 위험자산에 투자한 돈도 큰 손실을 봤고, 돈을 빌려간 국내 기업들이 부도 위기에 처하며 빌려준 돈을 떼이기도 했다. 종금사가 해외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하게 되자 정부는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투입해 대신 갚아나갔다. 그러나 한국 금융기관의 부실이 알려지며 해외 금융기관들은 대출금 회수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결국 당장 갚아야 할 액수가 정부 보유 달러로도 다 해결하지 못할 만큼 늘어났다. 나중에는 종금사뿐만 아니라 시중은행이 빌린 외화도 마찬가지였다.

80년대 초반의 과잉 투자는 해외 경기 호조 속에 수출 증대로 해결되었다. 90년대 중반의 과잉 투자는 그렇지 못했다. 투자는 마구 늘렸지만 수출은 부진하니 경상수지 적자가 쌓여갔다. 빚내서 공장 짓고 시설 확장했는데 만든 물건이 안 팔리면? 결과는 부도다. 1997년 초, 6조 원 가까운 빚을 진 한보그룹이 부도 처리됐다. 이후 11월 초까지 삼미, 진로, 대농, 한신, 기아, 해태, 뉴코아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특히 7월에 발생한 기아그룹 도산은 10조 원에 육박하는 부채를 남김으로써 금융권 부실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금융기관과 대기업의 부실을 정리하기 위해 정부가 투입한 돈, 즉 공적자금은 1998년 5월 64조 원을 시작으로 총 168조 7000억 원이다. 당시 GDP의 30%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다. 2016년까지 이때 투입된 공적자금 중 약 3분의 2만 회수되었다. 즉 60조 원 넘는 국민 세금이 금융기관과 대기업이 저지른 사고 뒤치다꺼리하느라 사라졌다.

공적자금 투입에는 구조조정이 뒤따른다. 금융기관 구조조정의 결과는 대량의 합병과 퇴출이었다. 1997년 말, 2천 개 넘는 금융기관 중 절반 가까이가 합병 또는 퇴출되었다. 33개 은행 중 16개가 영업을 중단했다. 36개 증권사 중 15개, 50개 보험사 중 20개 역시 정리되었다. 가장 문제가 컸던 종금사는 30개에서 8개로 줄었다(그 뒤에도 종금사는 계속 퇴출되어현재는 한 군데만 남아 있다.) 그 밖에도 저축은행과 신용협동조합 수백 곳이 사라졌다. 당시 금융계 퇴출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은 거의 1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퇴출, 빅딜, 워크아웃 등을 거쳐 외환위기 직전의 30대 재벌기업 증 17개가 해체 또는 매각되었다. 이때 살아남은 재벌기업들은 선택과 집중으로 규모를 키워 그 뒤로 훨씬 더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구조조정은 공공부문에서도 이뤄졌다. 한국중공업, 한국통신, 한국전력, 담배인삼공사 등 다수 공기업이 민영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10만 명이상의 공공부문 인력이 감축되었다. 공무원 역시 수만 명이 감축되었다.

IMF는 외환위기를 겪는 국가에 구제금융을 줄 때는 대상국에게 긴축과 함께 구조개혁을 요구하는 것이 방침으로 정해져 있다. 이를 ‘IMF 조건부(conditionality)’라고 한다. 한국에만 그렇게 요구한 것이 아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랬고, 당시 우리보다 먼저 구제금융을 받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도 그랬다.
구조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은 국가마다 다르지만 방향은 동일하다. IMF는 미국 주도로 창설되어 미국의 입김이 대폭 반영되어 있다. 미국은 대표적인 자유시장 경제체제 국가다. 시장론자 입장에서 보면 외환위기는 시장이 취약하고 정부가 시장에 지나치게 개입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의 경우도 관치금융과 정경유착, 그 결과인 기업의 방만한 경영과 취약한 금융 시스템이 외환위기의 중요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장론자 입장에서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이루려면 ‘굳건한’ 시장경제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필수다. 그래서 IMF가 요구하는 구조개혁의 방향은 바로 본연의 시장경제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은 경제 자유화였다.

긴축 운용 요구 중 특히 고금리가 문제였다. 고금리 정책은 해외 자본의 추가 이탈을 막는다는 명분이었다. 한국 경제에 불안감을 가진 해외 자본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려면 이자라도 높게 쳐줘야 한다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렇게 해서 해외 자본의 이탈을 막은 효과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금리가 한때 30%까지 오른 탓에 빚을 진 국내 기업들의 부담만 대폭 늘었다. 더구나 달러 빚을 진 기업들은 고금리에 환율 상승까지 더해 이중으로 부담을 짊어졌다.
고금리와 긴축적인 경제 운용으로 많은 기업이 부실해졌고 경기는 가라앉았다. 그 결과가 1998년 경제성장률 -5.5%로 나타났다. 경기 침체가 심각해지자 1998년 중순부터 금리를 인하했지만 뒷북 대응이었다. 1997년 12월 이후 1998년 5월까지 이미 1만 개를 훨씬 넘는 기업이 부도를 낸 뒤였다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 판도를 바꾼 것은 근로자파견법이다. 이 법으로 비정규직이 급증했고 차별 문제가 본격화되었다. 근로자파견법은 예외적인 상황에서 외부에서 파견된 노동자를 임시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 제도다. 가령 질병이나 출산으로 일시적으로 결원이 생긴 경우, 경비를 전문업체에 맡기는 경우, 국제회의를 개최하는데 통역사가 필요한 경우 등이다. 분명 원칙은 그랬다. 정리해고제나 파견근로제의 명분 자체는 타당하다. 겉으로 내세운 명분과 실제 운영이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주식시장을 개방하자 외국인의 주식보유 비중이 급증했다. 외환위기 직전 14% 정도였던 외국인 주식보유 비중은 약 4년 뒤인 2001년에는 40% 이상으로 늘어났다. 외국인의 주식보유 비중이 급격히 늘어난 데는 당시 외국인 입장에서는 한국 주식시장이 매력적인 투자처였다는 점이 한몫했을 것이다. 외환위기로 주식시장이 폭락해 1996년 4월 990이던 주가지수가 2년 뒤인 1998년 6월 280까지 떨어졌다. 환율은 두 배 이상 치솟았다. 주가는 폭락하고 환율은 폭등했으니 외국인 입장에서 한국 주식은 높은 수익률을 거둘 수 있는 투자 대상이었다. 더욱이 당시 우리 경제는 문제가 있었다고는 해도 외환위기를 겪은 다른 국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양호했다. 지금 국내 주식의 외국인 보유 비중은 30%가 약간 넘는 수준인데, 이 정도면 OECD 국가 중에서 상위권에 속한다.

외환위기는 수십 년간 이어져온 정부주도 경제성장 모델이 내적인 구조와 외적인 환경이 변한 탓에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어차피 바뀌어야 했지만 서서히 변하는 대신 갑작스레 닥쳤기 때문에 충격이 컸고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게다가 제대로 보완책을 갖추기도 전에 너무 많은 것이 지나치게 빨리 변한 탓에 가능한 결과 중에서 안 좋은 쪽으로 변화가 진행된 경우가 많았다. 우리 경제의 여러 부문에서 발생한 양극화 심화 현상 역시 그런 것 중의 일부다.
한편 외환위기 이후 사람들의 ‘경제’에 대한 관심도 크게 높아졌다. 사람들은 일기예보를 보듯이 매일의 주식 현황을 챙기게 됐다. 미국의 주식시장 변화나 금리 변동이 주요 뉴스가 되었다. 인기 정상의 여배우가 ‘부자 되세요’라고 외치는 모습이 공익광고인 양 널리 방송되었다. 바야흐로 일상의 시장화가 본격화되었고,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란 용어가 급속히 퍼졌다.

IMF와 한국 경제의 변화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277685

© 2024 코난북스